본문 바로가기
삼국지, 게임

제갈량의 남벌, 칠종칠금 총정리 (+만두의 유래)

by 쉼 표 2023. 5. 3.

제갈량이 남만의 수장인 맹획을 7번 잡았다 7번 풀어준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아무리 삼국지에 관심 없는 사람일지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다. 누군가는 ① 나관중이 제갈량을 띄우기 위해 창작한 거라 주장하며, 누군가는 ② 남만 이민족의 마음을 사기 위한 공심책(攻心)이라고 주장한다. 둘 다 일리 있는 말이다. 사실 정사에는 제갈량의 남만정벌이 딱 두줄 기록됐을 뿐이니, 대부분은 나관중의 창작물이 맞다. 하지만 맹획과 칠종칠금 모두 한진춘추와 화양국지, 자치통감에 나오므로, 이 둘만큼은 팩트일 가능성이 높다.

 

칠종칠금

 

제갈량이 남벌에 나선 이유

칠종칠금을 이민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공심책이라고 보기엔 행정가인 제갈량이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뭔가 석연치 않다. 단순히 남만의 이민족을 제압할 목적이었다면, 잘할 수 있는 다른 장수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제갈량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개인적으로 ③ 남만을 확실하게 촉나라에 편입시키기 위해, 인구조사 등과 같은 행정작업을 하기 위함이라는 의견이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인다.

 

서기 184년부터 280년까지 약 100년간의 이야기를 다룬 삼국지 시대에는 인당 노동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농기구나 농기계가 발전하지 않았던 관계로 인구수 자체가 국력이라 할 수 있다. 촉나라의 인구는 대략 90만명으로 위나라(약 430만명)와 오나라(약 250만명)에 비해 현격히 뒤처졌다. 따라서 촉나라 입장에서는 당시 무려 40만명 정도가 거주할 거라 예상되는 남만을 어떻게든 촉나라에 편입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인구조사를 제대로 하면, 주민들에게 조세를 징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징병도 가능해진다.

 

실제로 제갈량의 남벌(南伐) 이후 행정구역이 기존 4개군에서 7개군으로 확대개편되어, 타이트하게 관리됐던 것으로 확인된다. 문제는 남만이 대략적으로 현 중국의 운남성(雲南) 일대와 라오스, 미얀마, 태국 등지로 추정되는데, 이 지역은 밀림지역과 산악지역이 많아 누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세력을 키우는지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매번 맹획을 풀어줘 어디로 도망치는지 확인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정보가 됐다. (참고로 베트남은 사섭이 다스리던 교주(交州) 지역에 해당되며, 남만과는 거리가 멀다.)

 

칠종칠금 배경지식

중화사상에 따라 한족은 중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는 이민족들이 산다고 생각했다. 위치에 따라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부르는데, 남만은 중원 기준으로 최남단에 위치한다. 맹획은 사실 남만의 왕이 아니라 사실 남만지역의 호족이며, 유력 정치인이라 보는 게 맞다. 심지어 한족이었을 가능성도 높으며, 실제 칠종칠금 후 촉나라에 귀순했을 때 받은 직책 역시 문관직인 어사중승이었다.

 

다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월수지역의 태수로 등장하는 고정이 사실 월수지역 이민족 수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아마 나관중이 소설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맹획과 그 위치를 뒤바꿨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맹획이 귀순할 때 맹염이라는 일가친척도 함께 투항하는데, 이자의 행적을 보면 나름 강력했던 무장형 인물로 추정되는 만큼 정치인이었던 맹획에 맹염의 모습이 더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맹획, 고정, 옹개, 주포, 사마가

 

소설에서 제갈량의 남벌은 맹획이 고정, 옹개, 주포에게 반역을 사주하고, 이들이 응하면서 시작된다. 참고로 남만의 맹장으로 유명한 사마가는 남만출신이 맞지만, 남만정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이전에 펼쳐졌던 촉나라의 오나라 정벌에 참여했다가 이릉대전 때 사망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촉나라의 군사들이 공격해 오자, 맹획은 동생 맹우와 함께 방어하지만, 속수무책으로 계속 패배한다. 이 과정에서 금환삼결, 동도나, 아회남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이들은 주변 삼동(三洞)의 동주들이다. 참고로 여기서 동(洞)은 동굴을 의미하며, 이후 나오는 독룡동, 은갱동, 대래동 등 모두 동굴로 봐도 무관하다. 하지만 소설에서 사람들이 동굴에 산다고 묘사한 곳은 의외로 올돌골이 수장으로 있는 오과국 밖에 없으므로, 대충 외진 곳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맹우, 금환삼결, 동도나, 아회남, 타사대왕

 

남만정벌 중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맹획 단 한명 뿐이다. 즉, 맹우나 이들 동주들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다. 참고로 4차전까지는 기존 삼국지 스타일과 굉장히 비슷해 대부분 납득이 가는 전투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5차전부터는 사실상 판타지나 다름없다. 다만, 판타지 치고는 고증이 상당히 잘된 편이다.

 

보이차

5차전은 독룡동의 타사대왕이 등장하는데, 제갈량은 이곳에서 엄청난 고전을 한다. 이유는 독이 흐르는 시냇물 때문이었다. 실제로 동남아에서는 절대 수돗물을 그냥 마시지 않는데, 이유가 석회질이나 수인성 감염병(waterborne infection)에 걸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식당에서 보통 물이 아닌 차를 내오는 편이다. 삼국지에서 많은 병사들이 독룡동의 물에 오염되자 맹절(맹획의 형)이 추천해 준 해엽운향으로 해결하는데, 이 해엽운향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운남성의 보이차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축융부인, 대래동주, 목록대왕, 올돌골, 화만

 

베트남 찌우부인, 하얀 코끼리

6차전에서는 맹획의 아내인 축융부인과 대래동주(축융부인의 동생)가 등장하는데, 특히 축융부인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티브인 베트남의 찌우부인(Bà Triệu)은 축융부인이 활약했던 시기인 225년에 태어나 교주지역에서 오나라와 싸우다 22세에 사망한 독립투사다. 찌우부인은 전투 시 하얀 코끼리를 탔는데, 목록대왕의 설정에 영향을 준 것 같다. 목록대왕 역시 하얀 코끼리를 타고 등장하며, 맹수와 환술을 부릴 줄 안다. 당시 라오스와 태국 지역에서는 코끼리병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코끼리는 전투에서 탱크와 같은 역할을 했다.

 

7차전에 나오는 오과국왕 올돌골은 마지막 전투의 빌런인 만큼 온갖 설정이 다 포함됐는데, 키가 1장 2척으로 무려 276cm나 된다. 또한 오곡을 먹지 않으며, 피부가 비늘로 덮여있어 칼이나 화살이 뚫지 못했다고 한다. 신비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인지 오과국의 사람들은 모두 동굴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실제 운남성 옆동네인 귀주성(貴州)이나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등에는 놀랍게도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되어 있어, 현재도 동굴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라탄백

 

라탄, 만두의 유래

오과국의 등갑병은 창에 뚫리지 않는 갑옷을 매고 있어 제갈량 역시 전투에 애를 먹었다. 등갑병이 입고 있는 갑옷은 등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라탄(ratan)이다. 베트남에서는 이 라탄으로 만든 라탄백을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며, 재질이 굉장히 질긴 편이다. (그래서 기념품으로 사가는 관광객들도 많다.) 라탄으로 만든 갑옷은 기름을 먹였다 말리기를 수차례 반복했기 때문에 내구성이 더욱 강화됐고, 심지어 물에도 둥둥 떴으므로 수륙양육으로 전투가 가능했다.

 

다만, 기름에 튀긴 만큼 화공에 약했다. 이후 총 3만명에 달하는 등갑병을 단 한번의 화공으로 전멸시킨 제갈량은 죄책감에 빠지는데, 이는 추후 자신에게 노한 강의 신에게 만두를 바치는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격한 풍랑이 몰아치는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50명을 인신공양해야 됐지만, 더 이상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없었기에 밀가루에 고기를 넣고 머리모양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는 만두(饅頭)라 쓰지만, 그 유래는 남만인의 머리를 뜻하는 만두(蠻頭)와 속이는 머리를 뜻하는 만두(瞞頭)였을 가능성이 높다.

 


 

 

촉나라 4대 명재상 촉한사영 (+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

삼국 중에서 국력이 가장 뒤처졌던 촉나라가 나름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사실 초창기 촉나라는 마치 유망한 스타트업 회사와 비슷했기 때문에 온갖 인재들이 비전 하나만을 바

solenedu.tistory.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