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에 방영된 드라마 '나인: 아홉번의 시간여행'은 무려 20편으로 제작됐다. 요새 같으면 상상이 잘 안되지만,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20편으로 기획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딱히 제작사나 투자사가 혜자스럽게 투자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드라마들이 15회 정도가 넘어가면, 대체로 내용이 빈약해졌다. '나인'도 완성도가 높은 편이긴 하지만, 일부 쓸모없어 보이는 감정씬이나 회상씬이 있긴 하다.)
'나인'은 공중파 3사가 아닌 당시에는 생소했던 케이블 채널 tvN에서 방영한 무려(?) 타임슬립(time slip)에 관한 드라마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도 케이블 채널이었기 때문에 이런 파격적인 소재의 드라마를 방영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마침 영화 '나비효과'를 재미있게 봤던 나로서는 흥미로운 소재에 매력을 느껴 인생 최초로 매회 본방사수를 했을 정도로 굉장히 애정했다. (단, 시청률은 케이블 도입 초창기에 방영한 만큼 높지 않았지만, 종영 이후 정주행 열풍이 일어났을 정도로 드라마 자체는 성공했다.)
개인적으로 여주인공이 별 매력 없어도(?) 드라마가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깨달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 조윤희가 연기를 못한 것은 아니다. 그만큼 배우 이진욱이 역대급 연기를 선보이며, 멱살 잡고 드라마를 하드캐리 했다. 드라마 종영후 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진욱을 여전히 드라마 '나인'의 주인공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임팩트가 대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이진욱의 차기 작품들이 묻히는 안타까운 상황이기도 하다.
심지어 까메오 수준으로 출연한 영화 '뷰티 인사이드'를 이진욱의 대표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줬기 때문에 그렇게 착각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어쩌다보니 '뷰티 인사이드'를 영화관에서 시청했는데, 이진욱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거의 모든 여성관객들이 일제히 소리지르며 환호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거의 강동원이 우산을 치켜들며 등장하는 씬과 비슷한 정도의 임팩트였다고 보면 된다.) 암튼 각설하고 이진욱의, 이진욱에 의한, 이진욱을 위한 드라마였던 '나인'에 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드라마 나인 결말, 명대사
'나인'은 시간여행이 주요 테마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놓치면, 등장인물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갸우뚱하기 십상이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매개체는 향이다. 드라마에는 총 10개의 향이 등장하는데, 이진욱은 죽은 형이 쥐고 있던 1개의 향을 통해 향의 정체와 효과를 알게 되고, 나머지 9개의 향도 입수하게 된다. (좀 헷갈릴 수 있는데, 1회부터 3회까지 발생한 총 4번의 시간여행 모두 죽은 형에게서 입수한 1개의 향을 통해 한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중간에 향이 꺼지는 바람에 1개의 향으로 총 4번이나 시간여행을 한 것이다.)
향의 특징과 효력
향을 태우면 정확히 20년전 동일한 시간대와 장소로 갈 수 있는데, 향이 전부 타는데 걸리는 시간인 30여분 동안만 과거에 머물 수 있다. 과거로 가있는 동안에도 현재의 시간은 동일하게 흐르며, 향이 꺼지지 않는 한 현재로 돌아올 수 없다. 향을 태운 사람만이 과거로 갈 수 있으며, 타고 있는 향을 발견하거나 향의 연기를 맡는다고 해서 과거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로 가있는 동안 현재의 육체는 사라지며, 향이 다 타는 순간 현재로 육체가 돌아온다. (심지어 현재로 돌아올 당시 과거에서 들고 있던 물건도 함께 돌아온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향을 태워 과거로 가면, 과거의 나와 만날 수 있다. (즉, 과거의 나 입장에서는 미래의 나를 만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무려 20년이나 지난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에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다.) 과거로 가서 한 행동이나 말들은 고스란히 현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가 늘 꿈꾸던 '아 그때 이렇게 했어야 되는데...'를 모두 현실로 실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년전으로 돌아가 현재 내가 앓고 있는 병에 대한 힌트를 과거의 나에게 남겨 놓으면, 그 병을 미리 예방해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이용해 이진욱은 뇌졸중을 일으키는 교모세포종을 예방해, 이미 병으로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돌아오기도 한다. (깔끔하게 과거의 나에게 직접 말할 수도 있지만, 이런 판타지 같은 상황을 과거의 내가 잘 믿지 않는 것이 문제다. 오히려 이 부분 때문에 굉장히 현실감이 높았던 것 같다. 실제 현실에서 만약 20년 뒤의 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말하는 걸 내가 과연 곧이곧대로 믿을까?)
문제는 이렇게 과거에 가서 한 행동들이 원치 않는 방향대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불행하게 죽은 형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과거를 고쳤는데, 자신의 연인이 형의 딸로 변해 조카가 돼버린다면, 정말 기가 막히긴 할 것 같다. 굉장히 막장처럼 보이지만, 드라마를 보다보면 딱히 막장 같기보다는 오히려 슬픈 운명의 장난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만큼 이진욱이 연기를 잘한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나인의 결말
드라마를 집필한 송재정 작가가 공식적인 인터뷰를 통해 열린결말이라 밝혔기 때문에, 결말에 대한 해석은 시청자들 개개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가지 자신만의 해석을 담은 결말들이 많은 것 같다. (그만큼 애정을 가지고 이 드라마를 시청한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몇가지 단서를 가지고 해석하면, 상상이 쉽다. ① 기본적으로 과거에서 벌어진 일들은 화면의 색이 세피아 톤으로 변한다. ② 마지막 장면에서 이진욱이 네팔의 포카라(Pokhara)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화면의 색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③ 20회 이후에 1회를 이어 보면 알겠지만, 이야기는 그대로 다시 이어진다. 드라마의 이야기 자체가 이진욱이 포카라로 떠나면서 시작됐던 것이다. 즉, 이진욱이 극중에 했던 대사처럼 이진욱 자체가 향으로서 계속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많은 부분들이 단번에 해석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세한 설정오류가 있어 아쉽긴 하다. 애초에 작가가 원고를 완료한 상태에서 촬영을 시작한게 아니라 각종 설정들을 치밀하게 챙기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참고로 촬영이 들어갈 시점에 14회분의 시나리오가 완료됐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OST도 굉장히 좋았는데, 이중에서 김연우의 '그대라서'와 이지혜의 '아홉개의 향'이 정말 좋다. 드라마가 좋았던 분들은 꼭 한번 찾아들어보는 걸 추천한다.
드라마 나인의 명대사
워낙에 좋은 명대사들이 많아 일일이 소개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아 가장 좋았던 대사 하나를 꼽아봤다. 마지막회에서 이진욱이 과거의 자신인 박형식에게 말하는 장면인데, 지금 봐도 굉장히 뭉클하다.
"20년 전 나에게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 12시면 난 돌아갈거고, 다시는 여기에 올 수 없어. 어떤 메시지를 남겨도 대답할 수도 없고. 그러니 이제 날 잊고 니 삶을 살아.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궁금해할 필요도 없어. 니 순간순간의 선택이 나를 만든 거니까. 말했지? 너는 늘 괜찮은 선택을 했고, 잘 살아갈 거라고. 그러니까 내 존재는 잊어. 니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보면, 20년 후에 거울에서 날 만나게 될테니까. 우리 20년 후에 보자."
유튜브 채널 디글(tvN)에서 '나인'을 4~7분 단위의 클립으로 끊어 전편을 게시해놨길래, 짬짬이 한편씩 보다 보니 어느새 전편을 다시 한번 봤다. 예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설정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고, 편집이 좀 늘어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최근에 나온 드라마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구성과 연출이 탄탄한 것 같다. 확실히 누군가의 인생 드라마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웰메이드 드라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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