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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일년살기/역사, 정치

베트남 사이공 해방기념일 유래 (+베트남 전쟁 총정리)

by 여의도 제갈량 2022.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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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사이공 해방기념일과 헷갈리는 공휴일이 있다면, 바로 베트남 독립기념일이다. 베트남 독립기념일은 지난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와 일본이 저질렀던 식민통치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끝났음을 국부(國父) 호치민(胡志明)이 선언했던 날에서 유래한다. (1945년 9월 2일) 반면, 사이공 해방기념일은 이후 냉전시대에 등장했던 좌우진영 간의 대결이 폭발했던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월맹)이 남베트남(월남)의 수도 사이공을 점령했던 날을 기념하는 공휴일이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독립기념일 유래 (+베트남 광복절)

매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광복절(光復節)이다. 광복은 말 그대로 빛(=주권)을 되찾았음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일할 때는 단순히 쉴 수 있는 날이라 좋았지만, (해외에 있으면 모두가 애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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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을 읽기에 앞서 이전 포스팅인 베트남 근대사와 관련된 내용을 먼저 살펴보는 것을 추천한다. 현재라는 역사는 과거가 쌓여서 형성됐기 때문에 이전 사건들을 충분히 이해해야, 좀 더 몰입감있게 즐길 수 있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한국의 근대사와 비교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단번에 이해하는 베트남 근대사 (+코친차이나,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의 역사는 한국의 그것과 너무도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그런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역사의 질곡이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난 일주일 동안 베트남 근대사에 푹 빠져 있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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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총정리, 사이공 해방기념일 유래

⑩ 통킹만 사건 (1964년 8월)

미국은 적극적으로 개입해 베트콩들을 해결하고 싶어도, 한국전쟁과는 양상이 조금 달랐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한국전쟁의 경우, 북한이 38선을 넘어 남침한 명백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개입할 명분이 충분했지만, 현실에서 북베트남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남베트남에 있는 베트콩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는 정황근거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만약, 미국이 북베트남을 이유없이 공격하면, 소련과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이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찰나에 1964년 8월,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해군이 미국의 구축함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를 통해 전쟁개입의 구실을 잡은 미국은 베트남에 미군을 보내게 된다. (이제는 많이 알려졌지만, 통킹만 사건 자체만 보면, 이는 확실한 미국의 자작극이었다.) 사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일으키기 이전부터 남베트남에 천문학적인 지원을 했지만, 부정부패가 만연한 남베트남 정부가 이를 국민들을 위해 사용한게 아니라 자신들의 부를 쌓는데 이용했다. 그래서 1965년에 들어서는 베트콩을 막아내지 못할 정도로 이미 군사적으로 붕괴된 상태였다.

 

⑪ 미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참패한 이유

우리는 이미 베트남 전쟁의 결론을 알고 있다. 당시나 지금이나 천문학적인 비용을 국방비에 쏟아붓는 천조국 미국이 어떻게 베트콩을 이기지 못했을까 싶은데, 그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일단, ㉮ 전쟁에 주축이 돼야 될 남베트남군이 애초에 싸울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미군이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그대로 북베트남으로 날아가버린 경우마저 있었을 정도로 기강이 완전히 무너져있었다. 급하게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까지 미군을 빨리 투입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더불어 ㉯ 북베트남으로 진격할 수 없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핸디캡으로 작용했다. 전쟁의 판도를 단번에 바꿀 수 있는 전략은 적의 본진을 급습하는건데, 앞서 밝힌 이유로 베트남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염려한 미군이 북위 17도 이상으로 진격하질 않았다. 그냥 남진하는 북베트남군과만 교전했을 뿐이다. (마치 디펜스 게임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뿐만 아니라 ㉰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베트콩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하면, 아예 구분할 수 없다는 것 역시 큰 문제였다. 애초에 베트콩들의 기반세력이 남베트남의 농민들인 만큼 그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 베트콩이 기본적으로 사용했던 전술이 흔하게 접할 수 없는 게릴라전이었다는 것이다. 베트콩들은 일명 구찌터널이라 불리는 땅굴을 파서 기습작전을 많이 펼쳤는데, 이 때문에 덩치가 큰 미군은 손쉽게 이들과 교전조차 하지 못하고 당하기 일쑤였다.

 

마지막으로 ㉲ 베트콩들이 파놓은 땅굴들이 종국에는 밀림지역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지역에 대한 미군의 경험이 많지 않았다는 것 역시 치명적이었다. 이에 밀림에 형성된 수많은 나무들을 단번에 없애기 위해 엄청난 양의 제초제인 고엽제를 뿌린 것이다. 고엽제가 사람에게 닿을 경우, 심한 피부병과 기형아를 출산할 수 있기 때문에 이후에 엄청난 후유증을 겪게 된 참전군인들이 많았던 것이다.

 

⑫ 한국군 파병 (1965년)

한국은 베트남 전쟁 초반인 1965년부터 파병을 결심했다. 한국은 당시 첫 해외파병을 했으며, 이후 8년 5개월 동안 무려 32만명이 파견해 미군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파병에 참여했던 군인들은 해병대나 사단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은 군인들 위주로 선발됐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 무려 3년동안 실전(한국전쟁)을 겪었던 탓에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서 압도적인 작전수행능력을 보여줬다.

 

실제로 이와 관련된 기록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병사 1명의 개인전투력을 나타내는 사상자 교환비율이라는 지표가 있는데, 우수한 미군의 경우 1명의 병사가 9명의 적군을 처리했던 반면, 한국군은 참전 초창기에는 25명, 후반기에는 무려 100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이에 미군과 다양한 작전을 같이 수행했으며, 베트남 전쟁 기간동안 실행됐던 작전횟수는 약 59,000회에 달했을 정도로 많았다. 심지어 베트콩 내부문건에는 승리에 100% 자신이 없을 경우에는 한국군과의 교전을 최대한 피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하니 말 다했다.

 

⑬ 구정공세 (1968년 1월 30일)

다양한 문제들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미군은 엄청난 양의 폭탄을 쏟아부으며, 전쟁의 주도권과 전략적인 우위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이에 북베트남은 전쟁의 양상을 바꾸기 위해 구정 대공세(Sự kiện Tết Mậu Thân)를 기획하게 된다. 음력설은 베트남 최대명절인 만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당시에도 매년 음력설만큼은 잠시나마 휴전을 해왔던 암묵적인 약속을 깨고, 1968년 1월 30일에 대대적인 기습공격에 나서 단번에 100여개의 도시를 공격한 것이다.

 

이때 북베트남은 직접 군대를 동시다발적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남베트남에 있는 베트콩에게 지시해 이들을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미군과 동맹군, 남베트남군은 처음에는 몹시 당황했지만 이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성공해 오히려 이를 계기로 베트콩들을 거의 괴멸시킬 수 있었다. 사실 베트콩은 정글에서 게릴라전으로 싸웠기 때문에 미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지, 시가전에 들어서니 도저히 상대가 안됐다. (한편에서는 북베트남 측에서 추후 통일이 됐을 때 베트콩과 주도권을 두고 경쟁할 것을 염려해 무리한 작전을 진행시켰다고 주장한다.)

 

⑭ 베트콩의 미국 대사관 점령, 미국내 반전시위

하지만 전격적인 기습작전이었던 구정 대공세는 상당히 효과적이었고, 이 과정에서 잠시나마 베트콩이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기도 했다. 문제는 언론이 이 장면을 전 세계에 생중계하면서, 전쟁의 양상을 뒤바꿔버렸다. 당연히 미국 내에서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를 계기로 반전운동이 촉발됐다. 대다수의 미국국민 입장에서는 당연히 미군이 압도적으로 잘 싸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대사관까지 빼앗겼다는 소식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결국 닉슨 대통령이 1969년부터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결정하며, 베트남 전쟁은 끝이 났다.

 

즉, 베트남 전쟁은 자국내 반전시위의 영향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면 된다. 미군은 철수하는 와중에도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남베트남에게 넘겨주고 스스로 북베트남과 싸울 수 있는 전력을 만들어줬다. 이와 함께 1972년에는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에 나서, 중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계기와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힘썼다. 그리고 이후 1973년 1월에 파리에서 강화협정을 체결한 뒤 완전히 철수했다.

 

⑮ 사이공 해방기념일 (1975년 4월 30일)

이후 북베트남(월맹)은 1975년 3월에 남베트남 침략을 단행해, 불과 한두달여 사이인 4월 30일에 남베트남(월남)의 수도인 사이공(Sài Gòn)을 점령했다. (이때 북베트남군의 탱크가 대통령궁을 점령하는 모습이 당시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있다.) 결과적으로 북베트남은 불과 4개월 만에 남베트남 전역을 점령했으며, 결국 남베트남은 그해 멸망하게 된다. 이후 1975년 4월 30일은 공식적으로 사이공 해방기념일(Reunification Day)로 지정되었으며, 남부 해방기념일, 전승기념일, 통일의 날 등으로도 부른다.

 

사이공 해방기념일 이벤트

 

북베트남인들 입장에서는 수복이겠지만, 남베트남인들 입장에서는 점령당한 날이 되겠다.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에 미군은 헬기로 사이공을 대탈출하는 작전을 실행하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프리퀀트 윈드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이다. 총 7,000여명에 달하는 미국인과 남베트남 주요인사들을 탈출시킨 미군의 마지막 작전이었다. 이어서 북베트남의 처절한 숙청이 시작됐고, 미쳐 사이공을 탈출하지 못했던 남베트남 고위급 인사와 공무원, 군인들, 지역유지 등이 엑소더스(exodus)에 나서면서, 수많은 보트피플이 양상됐다.

 

베트남 국기, 금성홍기

 

이후 1976년에는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됐다. 미국으로서는 건국이래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아픈 손가락으로 남았으며, 이를 기점으로 모병제를 폐지하고 징병제를 채택했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 반대로 베트남 입장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민족을 외세로부터 지켜낸 해방전쟁이 되었고, 모든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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