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씨소프트가 유저들을 농락에 가까울 정도로 무시한 것은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2020년부터 BBIG 중심으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게임주 대장인 엔씨소프트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고객들에게 맘대로 해도 회사가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정말 놀랐을 정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분들의 성향이 대체로 온순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회사를 믿고 게임 아이템을 무려 1억원 넘게 쓴 고객을 담당자가 만나보지도 않고 쫓아낸 사건은 솔직히 지금도 믿기질 않습니다. (백화점에서 1억원을 썼으면, 무조건 VVIP 대접을 받을텐데..)
이렇게 안하무인(眼下無人)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던 엔씨소프트가 회심작 리니지W 출시를 앞두고, 이례적으로 2차례나 쇼케이스를 진행하면서, 거의 항복에 가까운 내용을 전격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앞으로는 게임의 본질에 집중할 것이며,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페이투윈(pay to win)이 되지 않도록 비즈니스 모델(business model)을 수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엔씨소프트가 이렇게나 급하게 태세전환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크게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1 : 리니지는 엔씨소프트의 심장
그동안의 행보를 보면 솔직히 이번 쇼케이스에서 회사가 공지한 말들이 믿기진 않지만, 리니지W가 망하면 존립까지 문제삼을 여론이 생길 것이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슨 게임 하나 잘 안된다고 해서 무려 코스피 시총 29위의 대기업이 무너질 거라며, 과장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회사의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엔씨소프트가 실질적으로 매출을 내고 있는 게임은 모조리 리니지 IP를 기반으로 제작됐습니다. 히트작들을 살펴볼까요? 리니지, 리니지2, 리니지M, 리니지2M 입니다.
솔직히 리니지 IP가 놀라운 점은 이를 활용해 엔씨소프트가 아닌 넷마블이 출시한 리니지2 레볼루션마저 역대급의 성공을 거뒀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리니지W는 반드시 성공시켜야 되는데, 문제는 리니지2에 비해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리니지2M은 리니지M에 비해 그래픽적인 면에서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2D에서 3D에 가까운 느낌으로 변했으니, 뭔가 진화된 신제품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쇼케이스 통해 확인된 리니지W의 인게임 영상을 보면, 리니지2M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스타크래프트의 배틀넷과 같이 전 세계 유저들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리니지W는 어느 정도의 성공은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한국 내에서의 리니지 IP 파워는 대단합니다. 다만, 무조건 초대박급의 성공을 거두지 않는 이상, 회사의 성장성에 대한 의심이 지속될 것이라는 점은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만약, 기대 이하의 성과가 나온다면, 리니지 IP의 신화가 깨짐과 동시에 그동안 너무 많은 과금을 진행한 탓에 리니지M과 리니지2M을 손절하지 못했던 기존 린저씨들(리니지+아저씨) 마저 돌아설 수 있습니다.
이슈 2 : 카니발라이제이션
문제는 카니발라이제이션(cannibalization)입니다. 모바일에서 역대급 히트를 친 리니지M과 리니지2M을 주로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기존 PC에서 즐기던 리니지와 리니지2 유저였습니다. 즉, 충성유저들인 린저씨들은 한정되 있는데, 이들은 자금력의 한계로 리니지와 리니지M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리니지M과 리니지2M을 동시에 하는 유저들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리니지W의 유저들은 기존 리니지M과 리니지2M의 유저들이 될 것이기에 장기적으로는 매출의 규모가 확대되기 어렵습니다. 다만, 리니지W는 전 세계의 유저들이 참여한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매출의 천장이 사라진 상태이긴 합니다.
엔씨소프트 계열사 현황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엔씨소프트가 그동안 해외진출에 손 놓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번번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엔씨소프트는 사업형 지주회사로서 굉장히 많은 자회사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NC West Holdings와 손자회사들을 통해 미국진출을 지속하고 있으며, 이외에 유럽, 캐나다, 일본, 대만, 베트남에도 법인을 설립한 상태입니다. 이 법인들이 리니지W의 전 세계 진출에 어떠한 시너지를 창출시킬지 두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현재 리니지M과 리니지2M은 린저씨들의 단물을 마지막으로 빨아내기 위해 엄청난 과금이벤트가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가장 좋은 변신등급이었던 신화등급 위에 유일등급이라는 것을 하나 더 런칭했는데, 이것을 뽑으려면 최소 20억원 이상이 들어갈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리니지M과 리니지2M의 유저들이 리니지W로 유입되도록, 최선을 다해 게임 생태계를 가혹하게 황폐화시킨 만큼, 혹시라도 리니지W가 망한다면, 기존 유저들이 돌아올 곳이 없어진 것과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사실 엔씨소프트도 동일한 리니지 IP만으로는 매출 확대의 한계를 느꼈는지, 보다 넓은 유저층을 확보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습니다. 다만, 리니지에서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적용해 출시한 어린이용 리니지, 트릭스터M과 무협판 리니지, 블레이드앤소울2가 시장에서 혹평을 받으며,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이에 주가 역시 반응해 수직하락하고 말았습니다. 다만, 이 시기에 리니지M 문양롤백사건과 트릭스터M 졸속출시, 블레이드앤소울2 유저기만 등과 같은 문제들이 축적되어 여론이 심각할 정도로 악화됐기에, 언론이 이를 집중 보도하며 사태가 일파만파 확대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냉정하게도) 회사가 고객을 무시했다고 해서 주가가 떨어진 게 아니라 유저층 확대에 실패한 엔씨소프트에는 더 이상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일련의 사건들은 회사가 자책골을 넣은 셈이니, 주주 입장에서는 어이없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깊이있는 이해가 필요하신 분들은 가장 하단에 있는 링크를 통해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결국 회사도 당장에 들끓고 있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대응에 나섰습니다. 유저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블레이드앤소울2의 시스템을 기존 매운맛에서 순한맛으로 수정했습니다. 심지어 리니지W의 출시도 서둘러 발표했습니다. 이에 되레 유저들이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회사에 놀랐는지, 평소라면 웬만한 일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택진이형(?)이 반응한다며 되레 놀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택진 대표이사가 이렇게나 과감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가가 떨어진다고 해서 어차피 들고 있는 주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주주들이 들고일어나 경영에 간섭하면 피곤해서 지기 때문일까요? 이 궁금증은 엔씨소프트의 현재 지배구조를 이해하면 대번에 이해가 됩니다.
이슈 3 : 엔씨소프트의 애매한 지배구조
의외로 엔씨소프트의 지배구조는 애매한 편입니다. 솔직히 지배구조를 제대로 살펴보기 전에는 김택진 대표가 엔씨소프트를 직접 세운 창업주인 만큼 굉장히 강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현재 본인이 확보하고 있는 지분율이 불과 11.97% 밖에 안됩니다. 물론 56.97%나 되는 주식이 개인투자자들에게 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규모의 자사주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장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지난 2015년에 겪었던 넥슨과의 경영권 분쟁을 되돌아보면, 김택진 대표 입장에서는 주주들의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2012년 6월 김택진 대표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엔씨소프트의 주식 14.96%를 넥슨(넥슨재팬)의 김정주 대표에게 매각해 최대주주 자리를 넘겨주고 2대주주로 내려앉은 적이 있습니다. 참고로 지분매각 후 김택진 대표가 보유한 잔여 지분율은 9.9%, 자사주는 1,950,000주(당시에는 8.93%)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두 회사는 서로 공생하는 절친한 사업 파트너처럼 보였습니다. 무려 미국의 유명 게임업체인 EA의 인수를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두 회사가 협업해서 각종 대작게임의 개발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준비했던 모든 협업들이 실패로 돌아갔고, 2014년 10월, 넥슨(넥슨코리아)이 엔씨소프트 지분 0.4%을 추가로 매입해 공정거래위원회에 기업결합 신고를 했습니다. (신고요건: 15%) 이로서 법적으로는 엔씨소프트가 넥슨의 계열사로 편입한 모양새가 이뤄졌습니다. 이후 2015년 1월, 넥슨이 엔씨소프트의 지분투자 목적을 단순투자에서 경영참여로 바꾼다고 공시하며, 본격적인 경영권 분쟁이 시작됐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김택진 대표의 아내인 윤송이 사장이 경영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넥슨이 엔씨소프트에 주주제안서를 보내는 등 한창 분쟁이 격화되자, 김택진 대표는 넷마블(넷마블 게임즈)에게 자사주 지분을 넘기는 대신, 넷마블 게임즈의 주식을 매입하고 엔씨소프트의 지적재산권을 활용할 수 있는 권리도 함께 보상차원에서 제공하는 전략으로 경영권을 방어했습니다. 추후 넷마블은 엔씨소프트의 지적재산권을 활용해 리니지2 레볼루션과 블레이드앤소울 레볼루션을 런칭해 초대박을 쳤습니다.
백기사 전략 때문에 당장 주주총회에서 표싸움을 해도 이길 가능성이 낮아진 탓인지 결국 2015년 10월에 넥슨은 시간외 블록딜로 보유지분 15.36% 전량을 넘기면서 분쟁은 완전 종료됐습니다. (엔씨소프트 전자공시를 보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엔씨소프트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사주는 이후에 다시 재취득한 물량입니다. 또한 기존에 넷마블과 맺었던 지분스왑의 기간이 6년이었던 관계로 지난 2021년 2월부로 보호예수가 종료됐으며, 현재는 넷마블이 원하면 언제든 매도할 수 있는 물량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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